새벽 축복: 느헤미야 프로젝트 3
1. 모두 힘을 내어 선한 일을 함께 시작하다(느 2:17-18)
2. 모두 참여하여 협력하면서 우선순위대로 성벽을 쌓다( 느 3:1-3)
3. 드고아 사람, 살룸과 딸들, 바룩이 힘써 한부분을 중수하다.( 느 3:5,13,20)
❤️ 우리가 힘써 새벽에 나오면 하늘로부터 온갖 좋은 것들이 비처럼 눈처럼 내려옵니다. 안전 건강 부요함과 풍성함 평안함과 담대함과 용기, 진실한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내려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과 성령님의 하나됨과 희생과 헌신의 최종열매, 기쁨과 감사 그리고 십자가의 기적과 부활과 최종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은총과 축복으로 모두가 모자람없습니다. 다른이에게 배려와 사랑 용서와 축복으로, 주어도 주어도 부족하지 않고 도리어 더욱더 풍성한 사랑과 축복의 만나와 메추라기를 체험하는 우리모두가 될줄 믿고 감사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비전의 동역자로서 한마음으로 서로서로, 가족, 친구, 공동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볼때 눈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웃고, 입술로 소리내어 인사하고 모두가 win win 건강하고 영생천국 영생행복한 우리모두, 감사 감사입니다!! ❤️
✅ 포기는 부활이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과 같으므로 서양문화권에서 부활의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결코 불합리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서양에서 보통 부활의 개념에 대해 듣는 것은 더 귀를 기울여 가까이 들어보면 전혀 불합리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적으로 우리의 신체적인 사망과 더불어 일어나는 어떤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일 의사가 있든 없든 현재의 이 삶이라는 것이 삶과 죽음이 서로 꼬리를 맞물고 일어나며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현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평생 동안 우리는 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한다.”고 세네카는 2천 년 전에 말했고, 에리히 프롬은 “더욱이 흥미를 돋우어 주는 것은, 생을 통해서 인간은 죽기를 배워야만 한다는 사실”이라 했다. 인간은 살아가면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을 체험할 것이고, 따라서 더 많은 죽음들도,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고통들도 체험할 것이다.
그러면 이 삶의 정신적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가능성이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좀더 완곡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생존의 고통이 감소되는 의식의 단계로 정신은 성장해 나갈 가능성이 있는가? 그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이다. “그렇다.” 고 하는 이유는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통은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끊임없는 훈련이 바른 길에 이르게 하기 때 문이다. 정신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아이에 비해 어른이 더 완전하 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미숙한 사람보다 훨씬 고통을 잘 견딘다 고 대답할 수 있다. 아이에게 큰 문제들과 고통을 주는 일들이 어른 들에게는 아무런 고통과 문제를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 대답이 “그렇다.”고 한 이유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남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이 자신에게 행복과 기쁨을 되돌 려 주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 그러나 그 대답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그러한 능력으 로 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즉 절실하게 도움을 필요 로하는 일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뛰어난 능력과 사랑이 있는 사람 은, 배고픈 아이에게 음식을 거절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체 없이 그의 능력과 사랑을 베풀어 주어야만 한다.
정신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엄격한 자기 훈련을 통해 사랑할 능력 을 갖춘 사람이며, 그 사랑의 능력 때문에 세상은 그들의 도움을 절 실히 청하게 된다. 그러면 그들 또한 그 부름에 응하여 사랑을 실천 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위대한 힘을 가진 사람 들로서 세상은 일반적으로 그들을 보통사람으로 보겠지만 그들은 조용히 숨어서 그들의 힘을 행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크게 고통을 당하고 위험할 정도로까지 괴로움을 당한다.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정을 해야 하는 것이고, 모든 점을 인식하면서 결정을 하는 과정이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어리숙한 인식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보다(대개의 결정들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런 결정은 잘못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두 장군이 자기 휘하 군인들을 전투에 나가게 할 것인지 아닌지 각각 결정을 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한 장군에게는 군단이 전략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장군은, 전략의 도구라는 점도 인정하기는 하지만, 각 개인의 생명을 일일이 인식하고 있고 또 각 개인의 가족의 생명까지도 일일이 인식하고 있다. 어떤 장군이 결정을 더 쉽게 할 수 있을까? 인식을 어리숙하게 하는 장군이 더 쉬울 것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말해서, 보다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에 따르는 고통을 견뎌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렇게 말하기가 쉬울 것이다.
“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장군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문제가 기업체의 회장이나, 의사, 선생, 부모가 되는 데에도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을 항상 해야만 한다. 가장 결정을 잘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정에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용의를 가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위대성의 척도는 고통을 감수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은 고통을 기쁘게 생각한다. 그래서 고통은 곧 기쁨이라는 역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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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







